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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舌)
- 네 언어의 한계는 곧 네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 by Ludwig Wittgenstein
5007 bytes / 조회: 496 / 2022.12.24 00:48
지중해식 생존요리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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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니 때도 귀찮아서 건너뛰기 십상인 음식을 아닌밤중에 하게 만든 동력은 김영하 작가의 '지중해식 생존요리법'이다.

작가의 산문 『오래 준비해온 대답』의 목차 중 '지중해식 생존요리법'을 읽다가 못참고 벌떡 일어나서 냉동실에서 해물모듬과 얼려둔 불린 미역(며칠 전 미역국을 끓이고 남은 미역)을 꺼내 해물볶음밥을 하고 미역국을 끓였다. 해물모듬은 마지막 남은 거라 알맹이가 하찮다. 

한파를 핑계삼아 집콕 했는데 내일은 정말 장 보러가야 된다. 냉장고가 정말 텅텅 비었음; 그나저나 야식 사진만 피하면 되는 줄 알았더니 작가의 수다가 복병이었을 줄이야...

 

참고로 작가가 맛있게 먹었다고 자랑한 '지중해식 생존 요리'는 봉골레 스파게티였지만 유감스럽게도 집에 파스타가 똑 떨어져서 아쉬우나마 해물볶음밥이 됐다. 며칠 전부터 이웃사촌 B가 파스타를 가져가라고 했는데 추워서 문밖에 일체 안 나갔더니 이렇게 아쉬운 일이 생긴다.

 

『오래 준비해온 대답』(개정전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은 작가가 벤쿠버에서 장기 체류하기 전 시칠리아에서 보낸 두 달 간 신변잡기. 작가가 시칠리아로 여행을 가고 책을 써낸 것은 스마트폰이 생기기 전으로 서울을 떠나 시칠리아 입성 전까지 작가 부부가 겪은 좌충우돌을 보니 스마트폰이 인류의 일상에 얼마나 혁명적인 변화를 가지고 왔는가 새삼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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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해먹고 치우면 어느새 두시가 넘어 있다. 햇볕은 뜨겁고 거리는 조용하다. 가게들은 문을 닫아걸고 큰 개들만 어슬렁거리며 거리를 쏘다닌다. 하는 수 없이 아내와 나도 꾸벅꾸벅 졸거나 좋은 햇볕을 아까워하며 빨래를 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오후가 그렇게 지나간다.

 

-p.78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오후'. 

작가만이 쓸 수 있는 이런 표현이 너무 좋다.

 

오랜만에 읽는 김영하의 산문인데 역시나 재미있다. 마치 바로 앞에서 작가의 육성으로 수다를 듣는 기분. 

나만 그런 건지, 김영하 산문을 읽으면 붕어똥처럼 하루키의 산문이 의식의 꼬리를 잡고 따라온다. 이 때가 유일하게 하루키의 글을 떠올리는 때인데 언젠가도 썼지만 두 작가는 닮은 점이 많다. 고양이를 키우고, 재즈를 좋아하고, 영화를 좋아하고, 여행을 좋아하고, 요리를 좋아하고. 두 작가의 산문은 대개 요리, 음악, 여행이 빠지지 않는다.


오랜만에 읽는 김영하의 산문집은 첫 장을 펼칠 때부터 시작된, 책을 살까말까 고민하는 동안에도 페이지가 야곰야곰 줄어들고 있다. 그런데 지금 독서를 멈추고 책을 사면 딱 읽은 데서 북마크 끼우고 책장 지박령이 될 확률이 반반이라서.

도서관책은 반납을 해야 하니 의무적으로 읽는다. 내 책장의 책은 놔두고 굳이 대출해서 읽는 이유인데... 내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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