끼니 때도 귀찮아서 건너뛰기 십상인 음식을 아닌밤중에 하게 만든 동력은 김영하 작가의 '지중해식 생존요리법'이다.
작가의 산문 『오래 준비해온 대답』의 목차 중 '지중해식 생존요리법'을 읽다가 못참고 벌떡 일어나서 냉동실에서 해물모듬과 얼려둔 불린 미역(며칠 전 미역국을 끓이고 남은 미역)을 꺼내 해물볶음밥을 하고 미역국을 끓였다. 해물모듬은 마지막 남은 거라 알맹이가 하찮다.
한파를 핑계삼아 집콕 했는데 내일은 정말 장 보러가야 된다. 냉장고가 정말 텅텅 비었음; 그나저나 야식 사진만 피하면 되는 줄 알았더니 작가의 수다가 복병이었을 줄이야...
참고로 작가가 맛있게 먹었다고 자랑한 '지중해식 생존 요리'는 봉골레 스파게티였지만 유감스럽게도 집에 파스타가 똑 떨어져서 아쉬우나마 해물볶음밥이 됐다. 며칠 전부터 이웃사촌 B가 파스타를 가져가라고 했는데 추워서 문밖에 일체 안 나갔더니 이렇게 아쉬운 일이 생긴다.
『오래 준비해온 대답』(개정전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은 작가가 벤쿠버에서 장기 체류하기 전 시칠리아에서 보낸 두 달 간 신변잡기. 작가가 시칠리아로 여행을 가고 책을 써낸 것은 스마트폰이 생기기 전으로 서울을 떠나 시칠리아 입성 전까지 작가 부부가 겪은 좌충우돌을 보니 스마트폰이 인류의 일상에 얼마나 혁명적인 변화를 가지고 왔는가 새삼스럽다.
밥을 해먹고 치우면 어느새 두시가 넘어 있다. 햇볕은 뜨겁고 거리는 조용하다. 가게들은 문을 닫아걸고 큰 개들만 어슬렁거리며 거리를 쏘다닌다. 하는 수 없이 아내와 나도 꾸벅꾸벅 졸거나 좋은 햇볕을 아까워하며 빨래를 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오후가 그렇게 지나간다.
-p.78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오후'.
작가만이 쓸 수 있는 이런 표현이 너무 좋다.
오랜만에 읽는 김영하의 산문인데 역시나 재미있다. 마치 바로 앞에서 작가의 육성으로 수다를 듣는 기분.
나만 그런 건지, 김영하 산문을 읽으면 붕어똥처럼 하루키의 산문이 의식의 꼬리를 잡고 따라온다. 이 때가 유일하게 하루키의 글을 떠올리는 때인데 언젠가도 썼지만 두 작가는 닮은 점이 많다. 고양이를 키우고, 재즈를 좋아하고, 영화를 좋아하고, 여행을 좋아하고, 요리를 좋아하고. 두 작가의 산문은 대개 요리, 음악, 여행이 빠지지 않는다.
오랜만에 읽는 김영하의 산문집은 첫 장을 펼칠 때부터 시작된, 책을 살까말까 고민하는 동안에도 페이지가 야곰야곰 줄어들고 있다. 그런데 지금 독서를 멈추고 책을 사면 딱 읽은 데서 북마크 끼우고 책장 지박령이 될 확률이 반반이라서.
도서관책은 반납을 해야 하니 의무적으로 읽는다. 내 책장의 책은 놔두고 굳이 대출해서 읽는 이유인데... 내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