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태ㅣ문학동네
장편인 줄 알았는데 단편집이다.
아홉 단편에 등장하는 화자들은 소시민이고 이들 소시민은 공통적으로 '강박'에 시달리고 있다. 편차는 있지만 소설에 등장하는 소시민의 강박은 대개 일상에 스며든 불안에서 기인한다. 강박과 불안이 가장 두드러지는 소설은 「팍스 아토미카」, 이외에 강박은 아니지만 화자의 불안이 독자의 긴장을 촉발하는 단편으로 「전조등」「태엽은 12와 1/2바퀴」를 꼽을 수 있다.
여기까지 쓰고보니 이 단편집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강박'과 '공포'가 아니라 '불안'과 '히스테리'인가 싶다.
소설을 읽는 동안 작가가 단어를 매우 능숙하게 또 효과적으로 사용한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예로 「무겁고 높은」은 들 수 없는 무게의 바벨을 드는 소녀(화자)와 다이빙이 하고 싶다는 젖은 머리(소녀)에서 읽을 수 있는 은유가 그러하다.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곳은 고가 다리인데 고가 다리는 폐광도시에 들어선 카지노에서 돈을 잃은 사람들이 수시로 뛰어내리는 곳이다. 이렇듯 '무겁고', '높은' 두 단어는 길지 않은 소설 내내 사고를 암시하는 은유를 던지고 독자는 '그 일'이 언제 벌어질까 불안하지만 얄밉게도 소설이 보여주는 것은 거기까지다.
사실 소설 전반이 이런 블러핑이랄지 맥거핀으로 가득하다. '그 일'이 언제 터질까 조마조마 지켜보다 보면 어느새 별 일 없이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는데 중요한 건 결국 모두 무사하지만 불안 요소는 여전히 일상 어딘가에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가장 행복하고 기억에 남을 순간 불빛이 사라진 어두운 시골 길에서 일어난 사고 영상이 저장된 노트북이 폐기 업체에 넘겨지고('전조등'), 204호에 투숙했던 손님이 남겨두고 간 정체 모를 검은 봉지가 모텔 주인의 손에 남겨진('태엽은 12와 1/2바퀴) 것처럼.
참고로 일상의 공포를 가장 잘 쓰는, 심리 스릴러의 GOAT는 아직까지는 스티븐 킹이다. (내 맘)
무튼. 이상의 근거로 책의 절반 정도를 읽었을 때 나는 작가가 왜 공포물을 쓰지 않는지 궁금했다.
작가가 소설의 배경으로 부조리가 만연하는 현실 세계를 선택했을 때 그 세계를 서술하는 작가의 태도는 대개 둘 중 하나다. 다정한 거짓말이거나 차가운 응시거나. 위선적이거나 위악적이거나.
냉소적이고 매정한 김기태의 단편은 한겨울 심해의 온도 같은 느낌인데 이를테면 컵에 물이 반이나 남았다고도 반 밖에 안 남았다고도 하지 않고 단지 '반이 남았다'고 말한다. 차가운 위로란 이런 것이지 않을까. 현실은 차갑지만 그곳에도 희망은 있다. 언어도 온도가 있다. 그리고 희망은 그 자체로 따뜻한 단어다.
초면인 김기태의 소설을 읽으면서 눈에 띄었던 것 하나는 문체였다. 이를테면 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던지기 위해 바벨을 드는 소녀의 「무겁고 높은」에는 '쇳덩이를 쥐고 두 발로 밀어내는 순간'(p.262), '왼발 오른발을 눈밭에 디디며 빙판과 진창의 시간을 예비하던 긴 겨울의 한가운데'(p.263) 처럼 김훈 식(式) 조어를 떠올리게 하는 문장이 등장한다. 스포하자면 결국 들지 못해 던지지도 못했던 바벨 소녀의 현실은 다행히 보통사람의 그것처럼 평범하게 흐른다.
가장 차갑다고 느꼈던 단편은 목차 중 첫 번째 소설 「세상 모든 바다」인데 이 소설에는 위로의 언어가 등장하지 않는다. 좀 더 슬퍼해야 할 것 같은데, 좀 더 책임감을 느끼고 좀 더 미안해해야 할 것 같은데 하쿠는 감정의 바다에 뛰어드는 대신 그곳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나 자신과 무관하지 않은 타인의 비극을 관찰한다. 하쿠의 모습에서 '비인간적'이 아닌 '비정하다'는 표현이 떠오른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어쨌든 우리는 점점 더 빠른 속도로 AI와 공존하는 세계로 가고 있으니까.
유럽 어느 언어로 된 이름이 분명한 디저트를 하나 입에 넣었다. 역시 달콤했다. 경박한 단맛이 아니라 깊이가 있고 구조가 있는 하지만 묘사해보려고 하면 이미 여운만 남기고 사라져서 어쩐지 조금 외로워지는 달콤함. 사람을 전혀 파괴하지 않고도 패배시킬 수 있는 달콤함.
p.176, 「보편 교양」
발췌는 과자가 아니라 문학을 얘기하는 느낌을 받았던 문장.
책 후면 문학평론가의 '일상성을 위협하는 비일관성'을 빌려와 부연하자면 대개 그날이 그날이라고 권태를 지겨워하면도 막상 일상의 루틴이 깨어지면 인간은 본능적으로 불안을 느끼고 불안은 강박을 부르고 강박은 공포에 뿌리를 내린다. 현대인의 공포는 역설적으로 과다한 정보에서 비롯되곤 한다. 특히 요즘처럼 클릭 몇 번이면 원하는 정보를 즉각 얻을 수 있는 디지털문명 시대는 '아는 게 힘'인 동시에 '모르는 게 약'인 시대인 것이다.
본격 AI 시대의 도래에도 결국 중요한 건 인간의 마음, 인간의 선택이라는 교훈.